마카비 항쟁과 하스몬 왕조 성립

 

마카비 항쟁과 하스몬 왕조

마카비 왕조라고도 알려진 하스모니아 왕조는 제2성전 시대에 유대 역사의 중추적인 장으로 등장했습니다. 기원전 152년부터 기원전 37년까지 지속된 이 왕조는 유대 민족의 정치적 자율성과 종교적 부활의 시기였습니다. 유다 마카비가 이끄는 하스모니안은 압제적인 셀류커스 제국에서 유대 지역을 성공적으로 해방하고 독립 유대 국가를 설립했습니다. 이 포스팅은 유대 문명의 더 넓은 맥락에서 하스모니안 왕조의 중요성을 밝히면서 하스모니안 왕조의 부상, 성취, 도전, 궁극적인 쇠퇴를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전까지 역사는 아래 링크된 글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알렉산더 대왕과 헬레니즘 제국

디아도코이 헬레니즘 제국의 종말

 

마카비 항쟁
마카비의 항쟁

 

1. 마카비 항쟁

1) 안티오커스 4세와 성전 모독

하스모니안 왕조는 유대 민족에게 헬레니즘 문화를 강요하려 했던 셀레우코스 왕조의 통치자인 안티오커스 4세 에피파네스의 통치로 그 기원을 추적합니다. 안티오커스 4세의 아버지인 안티오커스 3세는 기원전 200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던 유대지역을 쟁취하는데 성공합니다. 초기에는 안정화를 위해서 유화정책을 펼쳐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안티오커스 4세가 등극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됩니다.

기원전 167년에 안티오커스 4세는 유대교 관습을 금지하고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모독했습니다. 자신을 제우스라 칭하면서 유대 성전에 자신의 동상을 세웠고, 돼지 피를 뿌리는 등 유대인들이 부정하다 여기는 행위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 사이에 광범위한 저항을 촉발시켰고 곧 반란으로 이어졌습니다. 지방의 제사장이었던 맛다디아는 아들들을 이끌고 무장 항쟁을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맛다디아는 죽고 셋째 아들인 유다 마카비가 항쟁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마카비(마카베오) 항쟁 사건입니다.

2) 마카베오(마카비) 항쟁의 성공

마카비오 항쟁은 마카베오로 알려진 사제 전사 가족, 특히 마타티아스와 그의 아들들, 특히 유다 마카비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자치와 종교의 자유를 위해 싸우겠다는 그들의 결의는 대중의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그들은 빠르게 대중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게릴라전 전술과 깊은 종교적 열정을 통해 유다 마카비는 BC 164년에 셀류커스 군대를 무찌르고 마침내 성전을 수복했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성전에 등불을 밝혔고, 염원하던 제사를 올렸습니다. 그 등불은 단 하루치의 연료만 사용되었으나 무려 8일간 타올랐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유대인들은 명절로 삼아 대대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이날을 수전절, 혹은 하누카라고 하며 오늘날까지 12월 마다 지켜지는 유대인의 가장 큰 절기가 되었습니다.

 

하누카
성전 수복을 기념하는 하누카

 

3) 제정 권력의 통합과 왕조 성립

초기 승리 이후 마카비는 권력을 강화하고 안정적인 정부를 수립하는 임무에 직면했습니다. 마카비와 그의 후계자는 종교적 권위와 정치적 지도력을 결합하여 왕과 대제사장이라는 칭호를 겸하게 되었습니다. 유다 마카베오와 그의 후계자들의 지도 아래 하스모니안 왕조는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대하여 다양한 유대 파벌을 통합하고 유대 독립을 주장했습니다. 기원전 152년에는 마침내 셀류커스 왕조로부터 완전히 독립 된 자치 왕조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하스몬 왕조라고 부릅니다.

 

 

2. 하스몬 왕조의 업적과 도전

1) 성전의 회복

하스모니안 왕조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유대인 왕조의 회복과 종교적 헌신의 상징인 성전의 봉헌이었습니다. 하누카 축제는 이 사건을 기념하여 기름이 8일 동안 타오르는 기적을 기념합니다. 유대교 제사를 회복하고 성전을 정화하며 제사장 질서를 회복하여 유대교 생활에 활력을 불어 넣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목숨보다 중요시 여기는 것이 성전과 율법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2) 영토확장과 정치적 독립

하스몬 왕조의 통치자는 정치적 통찰력과 군사적 기량을 보여 예루살렘 너머로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하스몬 왕조는 초기에 유대교의 세계화를 꿈꿨습니다. 그래서 활발한 정복 사업을 벌였습니다. 그들은 유대, 사마리아, 갈릴리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으며 이두매(에돔 족속)와 트란스요르단(모압, 압몬 족속) 일부 지역과 같은 인접 지역을 정복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습니다. 하스몬 왕조의 영토 획득은 국가적 자부심을 제공하고 유대 독립을 더욱 공고히 만들었습니다.

3) 헬레니즘의 영향과 내부 투쟁

하스모니안 왕조는 유대인의 정체성과 종교적 전통을 보존하려고 노력했지만 동시에 헬레니즘 세계의 문화적 영향을 탐색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Hasmonean 가족의 일부 구성원은 헬레니즘 관습을 채택하여 유대 사회에 긴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내부 분열은 파벌의 부상과 왕조 내부의 권력 투쟁과 결합되어 왕조의 통합과 안정을 약화시켰습니다.

 

3. 하스모니안 왕조의 쇠퇴와 몰락

1) 권력 투쟁과 파벌주의

하스모니아 왕조가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내부 경쟁과 권력 투쟁이 심화되었습니다. 왕조는 통제권과 영향력을 놓고 경쟁하는 두 개의 주요 파벌인 바리새인(하시딤)과 사두개인으로 나뉘었습니다. 종교 제도를 대표하는 하시딤(바리새인)들은 유대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려고 노력한 반면 엘리트 사제 계급으로 구성된 사두개인들은 헬레니즘 관습에 더 기울었습니다. 이러한 분열은 왕조를 약화시켰고 외세 개입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2) 로마의 개입과 독립의 끝

하스몬 왕조의 쇠퇴는 로마 공화국의 확장과 그에 따른 로마 제국으로의 변모와 일치했습니다. 로마인들은 동지중해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면서 유대 문제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하스몬 왕조 내부는 권력 투쟁으로 인해 전혀 외세에 저항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파벌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로마를 유대 문제로 끌어들였습니다. 통치자들과의 정치적 책략과 변화하는 동맹은 결국 로마의 개입으로 이어졌습니다. 기원전 63년 카이사르, 크라수스와 삼두정치로 유명한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사실상 유대 독립을 종식시키고 로마의 지배를 시작했습니다.

 

폼페이우스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 유대 독립을 끝내다.

 

3) 헤롯의 통치와 유산

하스모니아 왕조가 멸망하자 로마인들은 이두미아의 통치자인 헤롯 대왕을 유대의 왕으로 임명했습니다. 하스모니아 혈통이 아닌 에돔의 귀족 출신이지만 헤롯은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하여 유대에서의 지배력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유대 통치의 외관을 유지하고 성전의 확장 및 개조를 포함한 야심찬 건축 프로젝트를 시행하여 유대인들의 환심을 샀습니다. 또한 하스몬 왕조의 공주와 혼인을 하면서 유대 지배에 대한 명분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이 헤롯 대왕의 시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한 이야기가 신약성경 마태복음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4. 결론

하스모니안 왕조는 유대 역사에서 중추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종교의 자유, 정치적 자율성, 유대 정체성의 보존을 위한 투쟁을 구현합니다. 사제 전사 가족으로 보잘것없게 시작한 하스모니아 왕조는 강력한 셀레우코스 제국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으로 부상했습니다. 군사적 승리, 종교적 재헌납, 영토 확장을 통해 그들은 유대인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고 다음 세대에 영감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들의 궁극적인 쇠퇴와 로마의 정복에도 불구하고 하스모니아 왕조는 유대인 의식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으며, 그들의 신앙과 유산을 보존하려는 민족의 회복력과 결단력을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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