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로폰네소스 전쟁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대결

 

펠로폰네소스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그 결과로 인한 영향이 어땠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아테네를 중심으로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하고 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아나톨리아 반도 서쪽과 에게 해를 중심으로한 지중해 해상의 패권을 장악하면서 아테네의 국력 성장은 날개를 달게 됩니다. 이러한 아테네의 급성장을 지켜보며 위기를 느낀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스파르타였습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에 대해 알아보려면 아래 글을 참고하세요.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 폴리스의 발전

같은 그리스 도시 국가라고는 하지만 여러 면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대척점에 있었습니다. 아테네는 민주정을 표방했고 스파르타는 소수의 엘리트 계층이 다수를 다스리는 군사적 독재 체제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아테네가 급격히 성장하자 그들의 민주정 체제 또한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스파르타의 소수가 억압하는 군사정 체제를 유지하는데 어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두 나라의 대결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이어졌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델로스 동맹(노란색)과 펠로폰네소스 동맹(주황색)
 

그 결과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는 동맹세력의 대결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바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입니다. BC 431년부터 BC 404년까지 약 27년 간 벌어진 당시로서는 세계전쟁 규모의 대결이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서 그리스 뿐 아니라 세계역사는 큰 변환점을 맞게 됩니다.

 

 

1.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발단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그 세력을 점차 키우게 되었습니다. 명목은 페르시아의 침략에 대한 견제와 대비였지만 아테네는 동맹을 이용해 자신들의 세력을 불렸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름은 동맹이었지만 아테네가 지배하는 구도로 가게 되었습니다. 특히나 아테네가 보유한 강력한 해군력은 이를 뒷받침했습니다. 반면 스파르타는 완전시민이라고 불리는 엘리트 중무장 보병이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충돌을 해군과 육군의 대결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큰 위협을 느끼며 아테네를 예의 주시하고 있던 스파르타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아테네가 코린트와 코르키라 사이의 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스파르타의 개입이 일어났습니다. 스파르타는 코린트 분쟁에 아테네가 철수할 것을 요구했지만 아테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두 나라는 전쟁으로 치닫게 됩니다.

 

2.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전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아르키다미아 전쟁을 1단계로, 시칠리아 원정을 2단계로, 아테네의 패배로 이어지는 3단계가 그것입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연설하는 아테네의 페리클레스
 

 

1단계 – 아르키다미아 전쟁

아르키다미아 전쟁(기원전 431-421년)으로 알려진 첫 번째 단계에서는 스파르타 왕 아르다무스 2세가 아테네 주변 지역인 아티카 침공을 이끌었습니다. 아테네는 지상에서 스파르타와 맞서는 것을 대비했고 지도자 페리클레스의 지도 아래 강력한 해군과 성벽의 보호에 의존하는 방어 전략을 채택했습니다.

전쟁은 양쪽 모두에게 피해를 입혔고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형세는 침공한 스파르타가 특별한 전공이 없이 돌아갔으므로 아테네의 승리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침공을 정면으로 맞서지 않으면서 시민들을 장벽 안으로 대피시키는 전략을 사용했는데, 인구 밀도가 높아지면서 도시 치안과 위생 관리에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결국 전염병이 도시를 황폐화 시켰고, 그 결과 지도자인 페리클레스가 사망하고 아테네의 사기가 약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는 전쟁의 첫 단계에서 살아남았습니다.

 

2단계 – 시칠리아 원정

시칠리아 원정(기원전 415-413년)으로 알려진 두 번째 단계는 전쟁의 주요 전환점이었습니다. 이점을 얻으려는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동맹인 시라쿠사를 공격하기 위해 시칠리아로 대규모 원정을 시작했습니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반도 밑에 있는 섬이지만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영향으로 시라쿠사를 필두로한 도시 국가들이 세워진 섬이었습니다. 우수한 해상 전력을 이용한 아테네의 침공은 스파르타에게 큰 피해를 줄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시칠리아 원정은 아테네의 철저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아테네 해군은 참담한 패배를 안게 되었고 함대와 군대의 상당 부분을 잃었습니다. 이 패배는 아테네를 심각하게 약화시켰고 스파르타의 자신감을 강화시켜 전쟁의 승기를 뺏기는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3단계 – 아테네의 항복

전쟁의 마지막 국면(기원전 413-404년)에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아테네를 점차 약화시키는 일련의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스파르타의 노련한 장군 리산드로스는 아테네의 필수 보급선을 봉쇄하여 도시 내 자원 부족을 초래했습니다. 기아에 직면한 아테네는 계속해서 전쟁을 이어갈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404년에 스파르타에 항복하여 전쟁을 종식시켰습니다.

 

3.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결과

장기간의 분쟁과 전쟁의 여러 국면을 거쳐 아테네는 마침내 스파르타의 우세한 군사력과 해군력에 굴복했습니다. 아테네의 항복은 아테네의 지배를 종식시켰고 그리스에 대한 스파르타의 헤게모니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30년 평화로 알려진 항복 조건은 스파르타의 동맹국들이 처음에 요구했던 가혹한 대우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대했습니다. 아테네는 비록 스파르타의 감독 하에 있었지만 민주 정부를 유지할 수 있었고 군사력은 줄어들었지만 도시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했습니다.

전쟁의 결과는 광범위했습니다.

 

1) 아테네의 해체

아테네는 제국을 해체하고 델로스 동맹의 일부였던 수많은 도시 국가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일부 도시는 스파르타 꼭두각시 정부를 선택했지만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자치 도시 국가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전쟁의 결과는 아테네 자체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도시는 권력, 명성, 부를 잃었습니다. 길고 비용이 많이 드는 분쟁은 전쟁 초기에 아테네를 강타한 파괴적인 전염병과 함께 도시 국가를 심각하게 약화시켰습니다. 또한 항복으로 아테네의 요새가 해체되고 해군이 손실되었으며 재정적 처벌이 부과되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영화300에서 묘사하는 스파르타 군대

 

2) 마케도니아의 부상

스파르타의 승리는 더 넓은 그리스 세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스파르타는 그리스 도시 국가에 대한 통제권과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스파르타 헤게모니를 수립했습니다. 지배 세력인 스파르타는 여러 도시에 동맹을 맺고 자신의 이익에 충실한 정부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헤게모니는 상대적으로 수명이 짧았고 그리스 내부와 외부 세력의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약해진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만든 권력 공백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권력을 잡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리스 국가의 분열과 취약성을 이용하여 필리포스2세는 일련의 군사 작전에 착수하여 점차 마케도니아의 통제하에 그리스를 정복했습니다.

 

3) 알렉산드로스 3세의 등장

마케도니아의 부상은 필리포스 2세의 아들 알렉산더 대왕이 마케도니아의 세력을 확장하고 그리스에서 이집트와 인도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결론적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결과는 스파르타의 승리였으며, 그 결과 아테네는 쇠퇴하고 스파르타 패권이 확립되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근본적으로 그리스의 힘의 균형을 재편하여 도시 국가를 약화시켰으며,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더 대왕 치하에서 마케도니아가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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